私の故郷は<月明洞>で、私はそこで生まれました。
そのとき月明洞は月が明るいということで「タルバッコル(月が明るい村)」と呼ばれました。
村があまりにも小さくて「コルチャギ(谷間)」と呼ばれたのです。
その当時、うちの村には「4軒の家」がありました。
隣はパク牧師の家で、その下が私の家、
その下はコ牧師の家、その下はナム執事の家でした。
村のすべての人はみんな教会に通っていました。
家が4軒しかなく、とても小さい村でしたが、その当時の4軒の家に牧師だけでも6人いたし、
その後から今まで13人の牧師を生みだしました。
月明洞は「聖職者の村」でもあります。
私の祖父は王に仕えて政治に携わっていましたが、日本統治時代に乱に見舞われました。
それで元は「コンジュ(公州)」が故郷でしたが、
「チンサン、ムクサン里」に逃れて「タルバッコル」つまり「現在の月明洞」に来ました。
祖父は月明洞で3ウォンの藁ぶき家を買って住み始め、
そこで次男を結婚させ、三男である私の父を結婚させました。
父は母と結婚して、祖父が3ウォンで買った
月明洞の藁葺き家に暮らして、7人兄弟を生み、私は3番目に生まれました。
母の故郷は「チンサンのキョチョン里」です。
4番目のキュソク牧師だけが、朝鮮戦争の時に生まれて、
故郷が「月明洞」ではなくて、母と同じく「チンサン、キョチョン里」です。
キュソク牧師は母と「故郷」も同じく、「生まれた家」も同じです。
そのためか、今も母と同じ部屋で過ごして、母の面倒を見る使命を果たしています。
私は生まれて間もなく、赤ん坊の時に「死に至る病」にかかりました。
ありとあらゆる薬を使っても治せませんでした。
そうしたある日、宵の口から死にかけていました。
結局、夕方になる前に死にました。
母は私に白い布をかぶせて、部屋の暖かくない所に置いておきました。
母は、夜が深まったら、みんなが寝ているときに、死んだ赤ん坊を甕(かめ)に入れて
持って行って埋めようと、場所を決めておいたそうです。
そこは今の自然聖殿の芝生から展望台に行く谷間でした。
人目につかない所でした。
赤ん坊にとっては「素焼きの甕」が「お棺」です。
生まれて1年の赤ん坊だから、「小さい甕」に入れて、ふたをして地に埋めれば、「墓」になります。
夜になって、みんなが眠りについたので、
母はちょうど嫁に行った娘の家に来ていた、自分の母と相談して、
赤ん坊を埋めるために行こうとしました。
埋める前に最後に、死んだけれども愛する息子の顔をもう一度見ようと、
顔までかぶせておいた白い布をめくって、油皿の明かりに照らして顔を見たそうです。
その時、赤ん坊が目を開けて、「目をパチパチ」していたそうです。
母は「今、この時だけ目を開けたのか」と感激して見ていましたが、
「私は死にません」と言っている気がしたそうです。
母は抱きしめて、部屋の温かい所に置いて、「もしかしたら、また死ぬのではないか」と思って、
明け方まで徹夜をして見守っていたそうです。
その時、「赤ちゃんは死なないで助かりそうだ」という気がしたそうです。
夜が明けて祖母が明け方早く「子どもはちゃんと埋めたか」と言ったので、
「生き返りました!」と言ったら、
「生命力があるね。しかし死んでから生き返ったから、よく見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たそうです。
それで母はご飯を炊きながらも、どうなるのかずっと見守ったけれども、
子どもが手を振ってはっきりした表情で笑っていたそうです。
その後、三日経って腫れ上がっていた全身の腫れが全部抜けて正常になり、
その時から健康に育ったそうです。
母が経験したとおりに、赤ん坊が死んで生き返ったから、生命力があると言って、
名前を「ミョンソク」と名付けたそうです。
全能者神様と聖霊様と御子が生かしました。
2014年3月16日 主日御言葉の中から
내 고향은 월명동이고, 나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그때 월명동은 달이 밝다고 해서 ‘달밝골’로 불렸습니다.
마을이 너무 작아 ‘골짜기’로 불린 것입니다.
그때 당시 우리 동네에는 ‘네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
윗집은 박 목사님 집이었고, 아랫집은 우리 집이었고,
그 아랫집은 고 목사님이었고 그 아랫집은 남 집사님 집이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다녔습니다.
집이 네 채밖에 없어서 마을이 매우 작았지만, 그 당시에 네 집에 목사만 여섯 명이 있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열세 명의 목사를 낳았습니다.
월명동은 ‘성직자 마을’이기도 합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왕 밑에서 수종을 들며 정치를 하시다가 일제 강점기에 난(亂)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공주’가 고향인데
‘진산 묵산리’로 피했다가 ‘달밝골’, 곧 ‘현재의 월명동’으로 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월명동에 3원짜리 초가집을 사서 살기 시작하셨고,
거기서 둘째 아들을 결혼시키고, 셋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결혼시켰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와 결혼하시어 선생의 할아버지가 3원을 주고 산
월명동 초가집에서 살면서 7남매를 낳았고, 나는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고향은 ‘진산 교촌리’입니다.
넷째인 규석 목사만 한국 남북 전쟁이 있었던 6.25 때 태어나서
고향이 ‘월명동’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와 같은 ‘진산 교촌리’입니다.
규석 목사는 어머니와 ‘고향’도 같고, ‘태어난 집’도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어머니와 한방에서 살면서 어머니 시중을 드는 사명을 가지고 삽니다.
나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갓난아기 때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서 아팠습니다.
온갖 약을 다 먹여도 못 고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부터 죽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녁이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이불로 덮어서 방 윗목에 밀어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밤이 깊어지면, 모두 잠을 잘 때 죽은 아기를 항아리에 넣어서
갖다 묻으려고 장소를 봐 놨다고 합니다.
그곳이 지금의 자연성전 잔디밭에서 전망대로 가는 골짜기였습니다.
사람의 눈에 잘 안 띄는 곳이었습니다.
아기에게는 ‘질항아리’가 ‘관’입니다.
태어난 지 1년 된 아기니까 ‘작은 항아리’에 넣어 뚜껑을 덮고 땅에 묻으면, ‘묘’가 됩니다.
밤중이 되어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들자
우리 어머니는 마침 시집간 딸네 집에 와 있었던 친정어머니와 의논하고,
아기를 땅에 묻으러 가려 했습니다.
묻기 전에 마지막으로, 죽었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얼굴까지 푹 덮어 놓은 홑이불을 벗기고 호롱불을 밝혀 얼굴을 봤답니다.
그때 아기가 눈을 뜨고 ‘깜빡깜빡’ 하고 있더랍니다.
어머니는 ‘지금 이때만 눈을 뜬 것인가?’ 하고 감격해서 쳐다보는데,
‘나 안 죽어요.’ 하는 느낌이 오더랍니다.
어머니는 꼭 끌어안고 아랫목에 놓고는 ‘혹시 다시 죽지 않으려나?’ 하고,
새벽까지 철야하며 지켜봤답니다.
그때 ‘아기가 안 죽고 살겠구나.’ 하는 마음이 오더랍니다.
날이 새고 친정어머니가 “아기 잘 묻고 왔냐?” 하는 말에 “다시 살았어요!” 하니,
“명도 길다. 그러나 죽었다 살았으니, 잘 봐야 된다.” 하셨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밥을 하면서도 어떻게 되는지 계속 지켜봤는데,
아기가 손을 흔들면서 똘망똘망하게 웃더랍니다.
그 후 3일 만에 죽었다 살아나서 퉁퉁 부었던 온몸의 붓기가 쫙 빠져 정상이 되었고,
그때부터 건강하게 컸답니다.
어머니가 겪은 대로 아기가 죽었다 살아났으니 명이 길다고 하며
아기의 이름을 ‘명석’이라고 지었답니다.
전능자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께서 살리셨습니다.
2014년 3월 16일 주일말씀 중